42.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을사사화
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42.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을사사화

by 별나라의 고미 2023. 3. 30.
728x90
반응형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인종이 1545년 8월에 불과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야말로 궁궐의 분위기는 급격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인종이 왕이 되었을 때,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 대윤세력의 중심인 윤임에게 암살을 당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경원대군(명종)을 매일 잠자리를 옮겨가며 경원대군(명종)을 보호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살해당할 위험 때문에 경원대군(명종)의 대리인을 뽑아, 경원대군이 절대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인종 재위 8개월 동안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문정왕후는, 이렇게 매일같이 장소를 이동해 자신의 아들을 지켰고, 한편으로는 효심 깊고 성품이 어진 인종의 심리를 이용하여, 인종에게 생떼를 부리며 자신의 아들과 집안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했다.
 
워낙 어질고, 효심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인종이기에 자신의 친어머니 장경왕후가 죽은 후, 자신을 길러준 문정왕후를 친어머니처럼 생각했고, 문정왕후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승진까지 시켜가며 문정왕후의 마음을 달랬다.
 
실록에는 대윤과 소윤 세력의 당파 싸움 정도로 기록되어 있지만, 야사에서는 대윤과 소윤 세력들은 서로 물고 뜯으며, 어떡하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서로를 제거하려고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인지 알 수는 없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문정왕후의 증오와 분노는 인종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한 순간에 폭발하게 되었다.

 
중종이 죽기 2년 전, 중종 38년에 동궁전의 화재로 인해, 화재를 일으킨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문정왕후와 소윤세력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인종을 추존하는 세력에 의해 분명 사사되거나 축출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어질고 착한 성품의 인종의 보호로 인해, 운좋게 살아남았고, 오히려 더 높은 관직을 윤허받고,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 다 권력의 맛을 보지는 못했다. 동궁전의 화재로 인해 문정왕후의 오라버니 윤원로는 이 일로 인해 유배 보내지게 된다.
윤원로는 야사에 의하면 성격이 급하고, 계획성 없이 급작스럽게 일을 벌여 윤원형을 당황스럽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동궁전 화재 사건 이후 윤원로가 총대를 메고 잠시 희생했고, 나중에 소윤세력이 유리해지는 시대가 열리면, 복위되어 자신이 희생한 만큼의 큰 보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종이 이제 막 왕위에 올랐을 때 여러 대신들과 대간들은 어떡하든 문정왕후의 소윤세력을 길들이기 위해 먼저 지난 동궁전 화재사건과 그동안의 윤원로의 행실을 토대로 윤원로의 죄를 물어 파직하기를 원했다.
워낙 대신, 대간들의 저항이 거세고 완강해서 결국 문정왕후는 오라버니 윤원로를 어루만져서 잠시 동안만 여러 신하들이 시키는대로 파직하자고 했고, 윤원로도 그렇게 받아들이며 총대매고 기다려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윤원로의 착각이었고, 이미 이때부터 이미 자신들에게 정치적인 부담을 안겨주고, 안하무인인 윤원로를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제거하기로 했던 것이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친형제도 이렇게 내쳐질수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형제애라고 부를 수도 있던 점은 인종이 죽고,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 윤원로를 당장 처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 문정왕후의 본격적인 복수타임이 시작된다.

문정왕후는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중종과 남곤세력이 정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밀지를 통해 몰래 일을 꾸몄던 기묘사화 때의  방법으로 대윤세력을 없애기로 했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처럼 수렴청정을 하기로 했는데, 수렴이란 말은 바를 아래로 내려놓고, 대비의 얼굴을 가리고 바 뒤에서 왕대신 정사를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아왔고, 알고 있는 왕 뒤에서 앉아, 바를 내리고 정사를 결정하는 수렴청정이 바로 문정왕후 때 최초로 시행된 것이다.
 

윤원형과 차근차근 준비해서 계획한 밀지에 의한 비선정치는 1545년 명종이 즉위한 후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때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고 효수되고, 유배 보내지게 되었는데, 이가 바로 을사사화이다.

반응형

 

을사사화의 시작

 
문정왕후는 인종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유지했던 대윤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준비한 밀지를 동생 윤원형에게 전했다.

윤원형은 밀지를 대표적인 소윤 세력 이기, 정순봉 등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밀지에 의해 모인 소윤세력의 장관들은 대윤의 수장, 윤임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동안 준비해 오고 수집해 온 죄목들을 통해 대간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문정왕후가 직접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에는 명분이 마땅치 않았기에, 밀지를 통해 미리 밑에서 공론화시킨 다음, 대신들과 대간들이 윤임의 죄를 묻고, 탄핵하라는 상소가 올라왔을 때, 마지못해 동의하여 윤임과 그의 세력들을 제거한다는 그런 모략이었던 것이다.

일단 밀지에 의해 공론화는 되었지만, 문제는 대간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반대의 이유는 조광조를 제거했던 기묘사화와 다를 바 없이, 왕의 명령을 정식으로 출납하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비밀리에 대신을 탄핵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신료들 중에 한 사람인 이언적은 이렇게 비공식적인 라인으로 명령을 내려 대신을 탄핵하는 것은, 결국 기묘사화와 같은 또 다른 사화를 불러와 억울한 대신과 대간, 사림세력이 숙청되는 피바람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니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정왕후는 이런 대간들이나 대신들의 의견에 주눅 들지 않고, 끝까지 완강하게 자신의 뜻을 주장했다.
대간들과 문정왕후 사이에 이런 신경전이 여러 번 반복되다가, 문정왕후는 대간들이 국사가 이렇게 엉망으로 기울어져 가는데도, 무릇 대간으로서의 행동은 하지 않고, 딴지를 걸고 있으니 대간들을 모두 파직하라 명하고 해임시켰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뜻대로, 대윤세력의 핵심인 윤인숙, 유관 등이 파직된다.
하지만 또 영의정을 비롯한 신료들과 병조판서 판서 권벌이 윤임 문제에 대해 상소를 올리며, 윤임에 대한 문제는 결정이 되지 않은 채 이렇게 계속 늘어지고 있었다.
 

윤임에 대한 문제가 계속 늘어지고 있을 때쯤 소윤세력의 중심 중 한 명인 정순봉은 대윤 세력의 중심이었던 윤임이 인종이 세자일 때 문정왕후와 윤원로, 윤원형 형제가 세자를 폐하고, 인종대신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을 보위로 올리려는 역모를 꾸몄으며, 유관은 인종이 선위 하던 날 영상과 내통하여 경원대군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위에 올려야 한다고 했다는것이다. 유인숙은 경원대군(명종)이 안질이라는 병이 있어 보위에 오르기에 부족하다고 정순봉이 이 증언을 들었기에, 정순봉은 윤임, 윤관, 유인숙의 음모와 모략을 통해 문정왕후의 밀지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려 문정왕후를 지원하게 된다.

 

그리고 윤임이 인종의 왕비인 인성왕후와 뭔가 교류가 있었다 하여, 이는 윤임 세력이 문정왕후와 경원대군(명종)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짜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이니, 큰 죄가 아닐 수 없다 하여 결국 윤임과 유관, 유인숙은 사약을 받게 된다.

이언적라는 신료는 끝까지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왕명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했으나, 문정왕후는 듣지 않았고 대윤세력의 핵심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이럴 때 항상 이런 상황을 이용해 출세하려는 간신들이 등장하는데, 김명윤이라는 자가 처형된 인종의 외삼촌 윤임에게 공모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명종 대신 봉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일러 받쳤다.

그러한 후 봉성군과 윤임의 조카 계림군 이유에게 역모로 죄를 덮어씌운다.

여기에서 봉성군은 중종의 비인 희빈홍씨의 아들이며, 대윤세력 윤임의 조카이다.

 
이렇게 윤임과 이유와 관계된 친척, 종들, 지인들 연루되거나 이름이 거론된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하였다.
고문에 의해 결국 이들은 윤임과, 이유가 명종의 병세가 걱정되니 경원대군(명종) 대신 봉성군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또 윤임의 사위 이덕응이 죽지 않기 위해, 알고 있던 사실에 살을 붙여 진술했다.

이렇게 대윤세력의 윤임, 유관, 유인숙의 역모증거가 수집되자 윤임, 유관, 유인숙, 이덕응은 죽은 뒤 목을 잘라 저작거리에 3일 동안 효수되었다.

또 이에 관계된 윤임, 이유, 유관, 유인숙의 아들 들은 교형, 나머지 친척들도 모조리 유배 보내졌고, 아내, 첩, 딸들은 노비로 보냈다.
먼저 도망쳐 목숨을 지켰던 이유도 결국 잡혀 효수되었다.
 
중종의 다섯째 아들이지만 윤임의 조카인 봉성군도 여러 신료들이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문정왕후가 봉성군은 너무 어려 그런 일을 도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며 봉성군을 보호하였다.
하지만 신료들이 끊임없이 명종의 안위를 위협한다 하여, 끝까지 봉성군의 죄를 묻자, 결국 문정왕후도 신료들의 의견들 받아들여 봉성군을 유배 보내게 된다.
 

을사사화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 듯했지만, 그 여파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2년 후 양재역 벽서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사림에 피바람이 불게 된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