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명종 - 문정왕후의 끝나지 않은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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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왕조

43. 명종 - 문정왕후의 끝나지 않은 을사사화

by 별나라의 고미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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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세력의 퇴장

 

명종이 즉위한 1545년,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비롯한 소임세력은 재빠르게 대윤세력의 교두보였던, 윤임, 이유, 유관, 유인숙을 능지처사 후 효수하여 제거했다.

그리고 당연히 숙청한 대윤세력의 자리는 소윤세력들이 대거 기용되어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을사사화 이후 사화를 기획하고 연출했던 소윤세력들은 그리 오래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특히 윤원형의 형이었던 윤원로는 인종이 기거하던 동궁전 화재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고 유배 보내졌다.

을사사화가 끝난 후 당연히 다시 정권을 잡으며 복귀하기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윤원로는 결국 문정왕후와 윤원형에 부름을 받지 못했다.

이에 불만을 간진 윤원형의 형, 윤원로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절대 대윤세력을 제거할 수 없었다며, 자신을 배제하고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을 차지한 윤원형에 더욱 시기하고 분노했다.

이를 듣게 된 윤원형은 워낙 다혈질 성격과 탐욕 또한 자신을 능가하는 형, 윤원로를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누이인 문정왕후와 자신에게 큰 화를 닥치게 할 것이 분명하기에 윤원로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윤원형은 윤원로 밑에 있다가 자기 밑으로 들어온 윤춘년에게 윤원로의 죄에 대한 상소를 거짓으로 만들어 올리게 했다.

 

윤원로가 인종이 생존해 있을 때, 문정왕후가 인종이 하루 빨리 죽기를 원했다고 모함하였으며, 대윤세력의 구심점인 윤임도 윤원로의 보복이 무서워 역모를 일으켰다고 거짓 상소를 올리게 된다.

또한 윤원로가 백성들의 수많은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탐욕을 일삼았고, 문정왕후도 연로해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것도 거짓 상소에 쓰였다.

 

이에 대간들은 윤원로를 탄핵하기를 원했고, 결국 윤원로는 다시 쫓겨나게 되었다.

처음에 대간들이 윤원로에게 큰 죄를 묻기를 원했으나 문정왕후는 듣지 않았다.

하지만 대간들이 계속 탄핵을 원하자, 문정왕후는 결국 얼마 후 윤원로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대윤세력을 제거하며 소윤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그 자리에 삼 남매 중 첫째인 윤원로에게 있을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을사사화를 기획하고 연출했던 소윤세력 정순봉, 임백령, 최보한, 이기 등이 하나둘씩 연로하거나, 병을 얻어 죽거나, 탄핵에 의해 관직을 잃고 얼마 후 죽게 되었다.

 

그렇게 소윤세력의 구심점들이 사라지면서, 어느덧 정권의 중심은 어느 한 곳으로 몰리게 되었으니, 바로 그곳이 윤원형이었던 것이다.

 

 

끝나지 않은 을사사화 – 양재역 벽서 사건 ( 정미사화 )

 

을사사화에 의해 대윤세력의 구심점인 윤임, 이유, 유관, 유인숙 등이 제거되었지만, 그들을 따랐던 사림세력들 여전히 건재해있었다.

그래서 바로 대윤세력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사실, 정권의 탐욕에 냄새를 맡은 소윤세력들은 자신들에게 두고두고 위협이 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 사림세력들을 이참에 제거하자는 목적이 더 컸을 거이고,, 문정왕후는 수렴청정하여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과 명종에게 딴지를 걸며 왕권을 견제하여, 신권을 더욱 권고히 하려는 사림세력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윤세력의 잔당들이 붕당을 조성하여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을 하여, 이임, 성세창, 유관, 이중열, 김저 등 수많은 사림세력들이 제거되게 된다.

 

그리고 15479월 소윤세력 중에 정언각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남아있는 대윤세력과 사림세력을 거짓 밀고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양재역 벽서 사건이다.

정확히 다시 말하자면 정언각이 거짓 벽서를 직접 쓰고, 직접 붙여, 직접 보고한, 그렇게 꾸며진 가짜 벽서였던 것이다.

 

양재역은 지금의 말죽거리가 있는 곳인데,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목적으로 유통과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정언각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붙여진 벽서에서 문정왕후를 모함하는 벽서를 그대로 떼어서 받치게 되었다.

벽서의 내용은 여주(문정왕후)가 간신 이기와 정권을 잡고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양재역 벽서로 인해 소윤세력들은 을사사화 때 대윤세력에 대한 죄를 엄하게 처리하지 않아 벌어진일이라 하여, 이와 관계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드리게 된다.

 

을사사화때 살아남았던 봉성군 이완도 이때 사사된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사사되거나 파직되어 변방에 보내진다.

 

이때 이언적도 유배보내진 후 6년 후 죽게 된다.

이언적은 중종 때 권신 김안로의 복귀를 반대하여 잠시 유배된 적도 있었고, 인종이 갑자기 운명하게 되었을 때도 명종의 수렴청정 문제에 대해서는 문정왕후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문정왕후가 권력을 행사하던 명종시대에도 고위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을사사화 때는 의금부사를 지냈고, 이후 2등 공신으로 책봉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언적은 그의 특이한 기질로 인해 대윤세력도 소윤세력도, 그 어느 편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을사사화 이후에도 소윤세력에게 굽신거리거나 비굴하지도 않았다.

그 어느 특정세력에도 물타기를 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지만, 소윤세력에 길들여지지 않는 그런 이언적은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세력에게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불필요한 사람이었기에 이참에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언적은 유배보내진 후 학문에 열중하여 집대성하게 되는데, 주리론(主理論)이 그의 가장 대표적인 이론이다. 이 이론은 이후 이황에게 계승되어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황은 명종뿐만 아니라 선조에게도 크게 인정받아 사림이 다시 정권에 복귀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남은 대윤세력의 숙청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양재동 벽서 사건으로 인해 사사된 이약빙의 아들 이홍윤이 지인들과 자주 모임을 갖고, 훗날 명종 이후 새 임금을 추대하려는 반역을 모의했다 하여 이와 관계된 이들 모조리 잡아들여 이홍윤, 모산수, 최대관 등 10명이 능지처사되고, 다른 10여 명도 고문을 받다가 죽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이들이 대부분 충청도 충주에 살고 있어, 충주를 반역의 땅으로 몰아붙였고, 인로인해 충주는 유신현, 충청도는 청홍도로 강등시켰다.

이를 정미사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을사사화와 을사사화의 연장선인 정미사화로 인해 죽어 나간 사람이 연산군 때보다 훨씬 많았고, 무려 10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명종즉위 이후 속전속결로 대윤세력과 대윤세력의 잔당과 사림을 제거한 후, 이제 조선은 20년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지배하의 나락으로 빠지게 되고, 그렇게 당시의 조선은 이들에게 마음껏 유린당하게 된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 인종, 명종에 이르러 백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지옥과 같은 삶이 이어졌고, 탐관오리들의 부조리와 강제 군역과 세금징수로 인해 고향을 도망가거나 산속으로 숨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산속으로 숨어들어 살게 된 이들은 산적이 되어 이런 탐관오리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부류의 도적이 되어갔다.

그러한 명종 시대의 대표적인 도적이 바로 임꺽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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