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춘몽, 또 다른 비극의 시작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고 세조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한편으로는 공신들의 충성에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단종의 경우와는 반대로 외척과 공신의 비호(庇護)가 있으면 안정된 왕권 유지가 가능하리라고 믿었는데, 자신의 그런 생각에 허점이 생긴 것이었다.
세조의 뇌리에는 불안함과 동시에 초조함이 밀려 들어왔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에게 여러모로 자신의 기조에 대해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해 볼 수밖에 없는 사안이 되고 말았다.
세조의 건강에 무리가 없었다면 이시애의 난은 그저 중앙 정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토호들의 하소연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세조의 초조함과 불안함은 아마 급작스럽게 악화한 자신의 건강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다.
이때쯤 세조의 온몸에 등창이 번져서 점점 손을 쓸 수 없는 정도였고, 피를 토하기도 했다.
얼굴빛도 어두워지면서 몸도 점점 많이 마르게 되었다.
그런 세조를 보고 정난공신이었던 양 정은 안타까워 그런 말을 한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시애의 난으로 인해 세조는 거대해진 구공신들의 세력을 이대로 그냥 이대로 놔둘 수 없었고, 구공신 세력을 경계하여 그들이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도록 뭔가 큰 수가 필요했다.
얼마 전 정난공신이었던 양 정을 위로하려 마련했던 술자리에서
이제 보위에서 그만 물러나라고 이야기한 양 정을 처형한 것은 단순히 술자리에서 취기로 인해 그런 결정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자신에게만 충성을 다하면 온갖 사리사욕을 취하고 탐욕스러운 관리가 되어 죄를 지어도 다 용서했던, 그 공신들이 이제는 자신과 왕세자의 보위를 위협하는 가장 두려움의 세력이라 생각했다.
구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조는 결국 젊거나 세력이 약한 무장이 주류인 신공신들을 이용하여 구공신들의 힘을 약화하기로 한 것이다.
이시애의 난을 통해 등장한 구성군 이 준, 남 이, 강 순, 어유소, 유자광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조는 술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한명회를 은근히 깎아내렸고, 반대로 구성군 이 준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을 치켜세우며 치하했다.
결국 얼마 후 스물여덟 밖에 되지 않은 구성군 이 준과 남 이는 영의정과 오위도총관에 오르게 된다. 남 이는 그 후 바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후 가장 파격적인 인사가 단행된 것이다.
구공신들의 충격과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조에게 불만을 표출했다가는 목숨을 잃는 게 뻔하기에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세조는 자신이 죽고 난 후 왕세자가 신공신들을 잘 통제하여 왕권과 보위를 잘 지킬수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세조의 건강은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급격하게 악화하였고, 구공신들의 불만과 신공신들의 안하무인(眼下無人) 행보는 더욱 세조의 결정을 혼란스럽게 했다.
구성군 이 준은 평소 말수가 적고, 자신의 의중을 잘 비추지 않으며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영의정까지 된 그런 왕족의 권세에 같이 하려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구성군을 남 이는 시기했고 술자리에서 세조에게 토해내기도 했다.
남 이는 아주 젊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 후 거주 여진의 정벌과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그 공을 인정받아 이제 막 공신의 대열에 합류한 혈기 왕성한 사내였다.
적개공신이 된 후 그의 자존감과 위세는 더욱 대단했다.
성격은 포악한 편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곧 일어날 남 이의 역모 사건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혈질이었으며 성격이 급하고 욱하여서 말을 쉽게 뱉어 주변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그러한 성격과 너무 저돌적인 행동으로 인해 구공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객실료들의 시기와 질투가 컸다
세조가 이런 그들의 행보를 모를 리 없었다.
구공신의 위세를 꺾기 위해 대립시켰던 신공신이 오히려 반대로 왕세자에게 위협이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세조는 이를 타개(打開)하기 위한 새로운 해법을 생각하게 된다.
원상제라는 것이다.
원상제는 어린 세자의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17명의 대신들을 원상으로 임명하여 4 교대로 돌아가며 세자와 함께 국사를 의논하고 처결하는 방안이다.
왕권 강화를 위해 세종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다시 태종의 6조 직계제를 운용해 왔던 기존의 세조의 기조가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젊었을 때는 진보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가면 정권이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보수적으로 바뀌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적어도 세조가 죽은 후 구공신들은 왕위를 탐하거나 반정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린 세자가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원상제를 내놓게 된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어린 왕세자의 왕위계승이 잘 마무리될 것이라고 안심한 세조는 세자에게 보위를 넘겨주려 준비하게 되고, 여러 대소신료가 반대하며 여러 날을 세조의 궁전 앞에서 곡을 하지만 결국 보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렇게 즉위하게 된 왕이 바로 예종이다.
예종 위로 적장자로서 의경세자가 있었지만, 1458년 세조가 즉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죽는 바람에 예종이 적정자가 된 것이다. 의경세자의 부인은 나중에 성종의 어머니가 되는 인수대비이기도 하다.
예종이 즉위한 후 다음 날, 세조는 미리 알고 있었다고 생각될 만큼 거짓말처럼, 1468년 9월 23일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수많은 공신과 친 형제들을 사지에 몰고, 단종까지 폐위하여 죽여 왕이 된 세조, 아주 오랫동안 왕이라는 권력에 취해 세상을 영원토록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그의 염원은 그리 길지 않은 찰나의 달콤함을 느끼고 사라지게 된다. 그러려고 그렇게 모질게 왕이 되었던 것인가.
세조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아주 복잡하고 얽히고설킨 비극은 이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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