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에게는 적장자로 의경세자가 있었다.
의경세자는 1438년 10월에 태어났다. 이때는 세종이 다스리던 치세의 시대였다.
세조와 정희왕후가 임신하게 되었을 때 원래는 대궐 밖에 나가서 아이를 낳는 게 법도였으나, 정의왕후가 워낙 세종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 정희왕후가 궁 안에서 자식을 낳게 할 수 있게 허락하였다.
첫 손주를 보게 된 세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했고, 지금의 말로 하자면 손자 사랑이 대단했다고 한다.
세종이 조금의 시간이 날 때면 의경세자를 앉고 궁궐을 돌아다니며 산책할 정도로 많이 아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의경세자는 어려서부터 늘 글공부에 소홀하지 않았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왕세자 교육인 서연을 하루에 2~3번 할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세조는 자신의 쿠데타로 인해 들어선 왕조인 만큼 강력한 왕권 유지를 위해 병서에 관한 공부도 강조했고, 의경세자는 이에 소홀하지 않았다.
지금도 늘 회자되기도 하지만 세조 이후 예종 대신 의경세자가 왕이 되어 10년 이상 보위를 유지했다면 후에 연산군과 중종, 인종과 같은 비극의 왕이 나타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성종이라는 성군을 볼 수 없게 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의경세자는 세조와는 크게 다르게 예의도 바르고, 숙부들을 공경하며 형제들과도 우애도 좋았다.
또 신하들을 대함에서도 늘 겸손하고 왕세자로서의 기품도 잃지 않아서 모든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세조도 이런 의경세자가 보위에 오른다면 자신의 쿠데타로 인한 백성들의 원망 어린 시선을 충분히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정된 왕권도 충분이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단종이 아직 왕위에 있을 때 세조와 정희왕후는 일찌감치 세종대왕 때 두 누이를 명나라 황실로 보내 세종의 신뢰를 얻게 된 한 확의 딸과 혼인시킨다.
이 한 확의 딸은 나중에 인수대비가 되는 소혜왕후이다. 소혜왕후는 의경세자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리고 소혜왕후는 조선시대 최초로 여성행실도를 책으로 편찬한 사람이기도 하다.
소혜왕후는 어려서부터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글공부에 성실하여, 학식이 풍부하여 한문으로 된 여러 경서들을 섭렵했으며, 불교에 대한 심의가 깊어서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기도 한다.
이러한 총명함은 물론이고 시아버지인 세조와 시어머니 정희왕후를 더욱 극진히 효심을 다해 모시는 소혜왕후를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젠 공신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그렇게 원하던 적장자에게 강력하고 안정적인 왕권과 더불어 건강하고 총명한 세손들까지 얻을 있을 것이라고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다르게 의경세자는 갑자기 병을 얻게 되어 1457년 9월 20일, 만 1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훗날 예종은 족질에 의한 세균성 질환으로 인해 패혈증으로 죽었다고 전해지지만, 의경세자의 죽음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다 보니 의경세자의 죽음에 대한 숱한 소문과 야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야사는 독자들도 익히 잘 아는 내용일 것이다.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 권 씨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세조의 두 아들 의경세자와 예종을 끊임없이 저주했다는 것이다.
그 후 의경세자와 예종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으로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야사가 만들어낸 극적인 스토리임이 분명할 것이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 씨의 저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의경세자는 1457년 9월에 사망했고, 단종은 같은 해이지만 2달 후인 1457년 11월 16일에 사망했기 때문에 단종이 죽기 전에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의경세자는 자신의 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 자기 삶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시 한 편을 남겨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고 전해진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고사를 이용, 자기 삶과 심정을 비유한 시였다.
의경세자의 병명은 지금도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위와 같은 저주설도 떠돌았고, 어떤 이는 워낙 갑자기 죽은지라 왕으로서는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숨길 수밖에 없는 복상사라는 설 도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복상사는 남녀가 성관계할 때 혈압이 급상승하여 심혈관과 심장이 압력을 못 이겨 뇌출혈 같은 현상 때문에 생기는 병사로 알려진다. 하지만 복상사는 그저 성관계에 의해서만 나타는 병은 아니라고 전해진다.
아마 심혈관이 미약하여 피를 토하거나, 뇌출혈로 인한 쇼크로 사경을 헤맸을 것이라고도 추측된다.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의경세자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이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로 퍼진 것이다.
세조는 의경세자가 죽고 큰 상심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으며 자신이 가진 풍수지리의 지식을 모두 동원하여 의경세자의 묫자리를 찾아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의경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의경세자의 부인이었던 소혜왕후, 훗날 인수대비는 하루아침에 사가로 내몰리게 된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기 전 맏아들 도원군과 혼인하여 군부인이 되었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도원군이 의경세자가 된 바람에 군부인에서 왕세자빈으로 신분 상승하여 수빈까지 되었는데 얼마나 상실감이 컸겠는가.
또 의경세자가 죽기 1년 전에 아버지 한 확이 명나라에서 세조에 대한 왕위를 인정받는 고명을 받고 오는 길에 병으로 사망하여 더욱 비통함과 상실감이 컸을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 바람에 조정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의경세자에게는 보위에 오를 수 있는 아들 월산군과 자을산군 2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월산군과 자을산군은 당시 너무 나이가 어려 왕위를 물려받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단종과는 달리 대비가 될 정희왕후가 생존해 있기 때문에 섭정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아무래도 정인지나 신숙주, 한명회 등의 구공신들에게는 어린 왕의 집권 시 불안정한 정권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컸던 것이다.
또 남 이의 죽음 이후 종친이었던 구성군 이 준의 존재는 반정의 위협이 되는 불안 요소로 충분했기 때문에 더욱 공신들은 나이 어린 왕의 집권을 반기지 않았다.
자신들이 세조 때 정난을 통해 정권을 잡았던지라 나이 어린 왕의 집권을 더욱 원치 않았고, 결국 세조의 적장자 의경세자의 아들 월산군과 자을산군을 뒤로하고, 세조의 둘째 아들인 의경세자보다 무려 12살이나 어린 예종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예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소혜왕후, 훗날 인수대비인 한 씨와 어린 두 아들 월산군과 자을산군은 사가로 나가 영원히 왕위와는 상관이 없을듯한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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