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 서열 3위 자을산군의 왕좌의 게임
성종은 흔히 세종대왕과 영조, 정조와 더불어 성군으로 추대받는 왕 중 한 명이다..
성종은 특히 세종대왕의 업적을 본받고 싶었고, 반정으로 인해 정당성이 훼손된 할아버지 세조의 업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라의 근본인 법을 널리 반포하여 그를 실행하려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전이 바로 경국대전이다.
어렸을 적 배워왔던 역사 교과서에서도 성종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은 ‘경국대전’이었다.
그전까지는 법은 조선의 법이 아닌 명나라의 법이었던 대명률을 기조로 했다.
독자적인 법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고려말부터 수집해 온 각종 법령과 판례, 관습을 모아 태조 때 경제육전을 만들었고,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태종과 세종 때에 이르러서도 경제육전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소육전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지고, 모순되는 사항도 많아 조선에는 좀 더 체계적인 법전이 시급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세조는 최 항, 강희맹, 노사신, 김국광, 서거정 등에 법전 편찬의 명을 내리게 된다.
경국대전이 이때부터 조금씩 완성되어 간 것이다.
세조 때에 1차로 호조(戶曹)가 먼저 완성되었으나 부족한 부분이 있어 다시 보완작업에 들어갔고, 세조의 죽음으로 인해 예종이 물려받아 2차 작업을 진행했다.
예종 사후 성종에 이르러 4차 수정에 이르러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481년 마지막 5차 작업을 통해 경국대전이 완성된다.
후에 더 이상 개수작업을 하지 않기로 한 후 1485년 경국대전에 의한 법령이 시행된다.
이렇게 성종의 근성과 집요한 끈기로 만들어진 경국대전으로 인해 조선은 건국 이후 진정한 나라의 기틀이 만들어져
이후 조선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사회 운영 시스템이 된다.
조선의 유교적 법치주의 확립은 경국대전으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시스템의 이론만을 강조한 체, 이를 이용하여 권력의 정점에 있으려는 대신과 대간들의 경쟁에 강력했던 왕권이 약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은 재위 기간이 25년(1470~1494)으로 그전 단종, 예종, 의경세자에 비해 짧은 편은 아니었다.
성종은 세조의 정난을 통해 공신이 되어 오랫동안 권력의 중심을 형성한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에 근거하던 사림세력과 감사를 위한 대간을 양성하고 등용한다.
이후 이들로 인해 정세는 아주 급격하게 요동치게 되고 , 성종의 재위 기간이었던25년으로 이를 모두 해결하기에는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성종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1. 서열 3위 자을산군, 왕의 이름으로
2. 유교적 법치국가를 위한 선택, 어우동과 폐비 윤 씨
3. 훈구 세력 대신 vs 사림,대간
4. 잘못된 선택인가! 최강 빌런 연산의 등장
5. 살아남은 서열 11 위 제안대군과 서열 22 위 월산대군
1. 서열 3위 자을산군, 왕의 이름으로
1469년 11월 28일, 제2의 세조의 현생이라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지니고 태어난 예종은 족질에 의한 병의 악화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단종에 이어 의경세자, 의경세자에 이어 예종까지 너무 이른 나이에 운명하다 보니, 민간에서는 온갖 루머들이 돌고 돌았다.
원래 의경세자 사후 왕이 되어야 할 의경세자의 두 아들을 제쳐두고 예종이 왕이 되었으니 이에 불만을 가진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독살했다는 것이다.
예종이 죽기 전 자을산군(성종)과 수라를 들게 되었는데, 그 후 예종이 죽게 된 것은 분명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예종이 죽은 지 2~3일도 안 돼서 사체의 부패가 심해진 점은 이를 더욱더 부채질한다.
자을산군의 어머니인 소혜왕후(인수대비)의 계략이 없지 않고는 예종이 갑작스럽게 죽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앞서서 말했다시피 야사에서 나오는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예종의 독살에 관여했다면 당연히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인수대비)가 가장 큰 의심을 받을터인데, 인수대비가 그러한 음모를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종이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와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 세력 대신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하루라도 빨리 불안정한 정권을 수습하기 위해 대책 마련을 서두르게 된다.
훈구대신의 중심에 있는 신숙주가 먼저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를 통해 정희왕후에게 운을 띄웠고, 이에 정희왕후는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두 번째 아들 자을산군이 왕위를 물려받게 하라고 정현조에게 이른다.
자을산군은 예종의 아들이 아닌, 먼저 세상을 떠난 예종의 형 의경세자의 아들이었다.
그것도 첫째가 아닌 두 번째 아들, 즉 서열 3위로써 왕의 보위와는 멀리 있었다.
아마도 자을산군이 왕으로 선택받게 된 이유는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이해가 맞아떨어졌지 않나 싶다.
자을산군의 부인은 한명회의 넷째 딸인 공혜왕후였다.
한명회의 셋째 딸이었던 예종의 비, 장순왕후가 인성대군을 낳다가 죽었고, 또 장순왕후의 아들 인성대군도 3살 때 죽었던지라 넷째 딸이 왕비가 된다면 그의 탐욕스러운 권력은 손쉽게 계속 유지될 것이었다.
정희왕후도 훈구파의 중심 한명회와 신숙주가 아직 12살밖에 안 된 자을산군 옆에서 원상이 되어준다면 충분히 성인이 될 때까지 왕권을 지킬 수 있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열 3위 자을산군에게는 위로 서열 2위인 형 월산군이 있었다.
성리학적 법도에 따라 자을산군이 먼저 왕위에 오르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한명회와 정희왕후는 이를 해결할 명분을 찾게 되었고, 결국 그 명분은 이러했다.
자을산군의 친형 월산군이 원래는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적장자였지만 몸이 허약하여 자주 시름하고, 병상에 눕는 일이 많아 걱정이 아닐 수 없으니 이는 의경세자나 예종의 전래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었다.
그리하여 몸도 건강하고 눈빛도 바르고 총기가 남달라 세종과 세조를 이을수 있는 자을산군을 보위에 오를 왕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희왕후와 구공신들, 훈구세력들은 12살밖에 안 된 어린 성종의 안정된 왕위 계승과 유지를 위해 특별한 장치들을 준비한다.
신숙주와 한명회 등은 왕이 너무 어리니 왕이 정사를 잘 헤아리고 결정할 수 있도록 원상제를 통해 정사를 다스릴 수 있도록 했다.
원상제는 말 그대로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책들을 심의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옆에서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훈구대신의 권세를 유지하고 왕을 길들이려는 훈구대신들의 의도였다.
그리고 그 위의 결정권자를 통해 합법적인 정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실행한다.
원상들과 왕위 결정한 사항에 대해 마지막으로 대비인 정희왕후에게 개가를 받는 것이었다.
정희왕후는 몇 번의 사양 끝에 대신들의 간곡한 청에 의해 수렴청정을 받아들이고, 말 그대로 조선 최고의 결정권자가 된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정책 결정에 있어 과다한 개입이나 부정한 청탁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손자인 성종이 성인이 되어 스스로 친정할 때까지 안정된 왕권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한 발짝 떨어져서 그저 지켜만 봤다.
그렇지만 정희왕후가 성종의 왕위 계승의 명분을 합리화하고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해 몇 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정리하였다.
우선 사망한 예종의 비였던 안순왕후가 보위에 오른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보다 서열이 높으므로 성리학적으로 서열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사망한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대하고, 어머니 소혜왕후를 왕대비로 봉했다. 이렇게 하여 소혜왕후(인수대비)가 예종의 어머니 안순왕후보다 서열이 앞서게 되었다.
또 앞에서 기술했듯이 이시애의 난 이후 급상승한 종친 세력 구성군 이 준과 영순군 이 부를 유배하거나 멀리 보내 성종이 성인이 되어 친정할 때까지 걸림돌이 되는 방해를 모두 정리했다.
이제 성종이 성인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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